비신자 입장에서 본 삼위일체론: 신학적 공리의 세계
삼위일체라는 논리적 난제를 수학의 허수 체계와 공리계의 관점에서 해석.
1. 외부자의 시선: 설정집으로서의 성경
기독교 신자들은 삼위일체의 실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하나이면서 셋인 게 논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거냐는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 같은 비신자의 입장에서 삼위일체는 별로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독특한 세계관 설정집일 뿐인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의 선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로 삼위일체는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하나이면서 어떻게 셋 일 수 있나?”라는 신앙인들의 의문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믿음이 없는 입장에서는 신의 전지전능함이나 삼위일체나 초자연적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설령 그것이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범주의 것이더라도 신은 셋이면서 하나인 상태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유독 삼위일체의 논리적 모순에만 집중하는 태도는 일관성이 부족해 보일 수 있다. 이는 마치 “산타와 이빨요정이 교통사고가 나서 길이 막혀 늦었어”라는 친구의 변명에 대고 “산타는 존재하지 않아.”라고 핀잔을 주는 장면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친구는 아마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이빨요정이 존재한다고는 너희들끼리 합의가 된 거구나?” 이처럼 외부자의 시선에서는 어느 전제를 믿고 어느 전제를 의심하는지가 임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2. 논리적 모순에 대한 재고: 본질과 위격
물론 혹자는 “아무리 신이 전능하더라도 ‘둥근 삼각형’처럼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모순까지 실재하게 할 수는 없다”라고 반론할지 모른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그런 종류의 모순이 되려면, “한 본질에는 하나의 위격만 존재할 수 있다”는 추가 전제가 먼저 필요하다. 이 전제는 삼위일체 비판에 흔히 암묵적으로 끼어들지만, 그 자체가 자명하게 증명된 것은 아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모순이란 같은 의미(같은 범주)에서 A와 not A가 동시에 성립하는 경우다. “신의 본질은 하나다”가 A라면, 모순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의 본질은 하나가 아니다(not A)”이지 “위격이 셋이다”가 아니다. 삼위일체에서 ‘셋’은 신의 본질이 아니라 위격(성부·성자·성령의 인격적 구별)에 대한 서술이기 때문이다. 즉 삼위일체는 A(본질 하나)와 not A(본질이 하나가 아님)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양립 가능한 A(본질 하나)와 B(위격 셋)를 함께 주장하는 구조다.
3. 신학적 공리와 허수 $i$의 비유
한편, 성경을 고대 문학처럼 바라보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입장에서 신학이란 실증적 진실의 세계라기보다는 외부적으로 닫혀있는 정교한 내부적 논리 체계에 가깝다. 때문에 비신자들은 오히려 신학의 내부적 논리 체계를 존중하여 별다른 저항감 없이 신학적 차원에서의 삼위일체를 인정하기가 쉽다. 삼위일체를 신앙인들이 내세운 이런 신학 내부적 공리의 조합으로 쉽게 받아들이는 식이다.
-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독립된 위격을 가졌다.
- 신은 유일하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본질인 하나의 신성이다.
- 이 두 가지 명제는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비신앙인에게 이 세 명제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체계가 성립하기 위한 대전제, 즉 공리와 같다. 따라서 이 공리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따질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참이라고 인정하고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 다만 신앙인들은 이를 공리가 아닌 계시라고 부른다. 이 계시들을 조합한 결론으로써 삼위일체를 인정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이는 마치 수학에서 $-1$의 제곱근을 $i$로 정의하는 것과 같다. $i$가 현실에서 어떤 모양인지, 길이가 얼마인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존재를 공리로써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e$를 $i$번 제곱하거나($e^i$), 심지어 $i$를 $i$번 제곱하는($i^i$) 연산을 생각해 보자. “어떻게 허수 번 곱하는가?” 이는 물리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연산이다. 하지만 수학적 정의(공리)를 따르면 이 연산은 완벽하게 가능하다.
전자의 계산 결과는 복소수($e^i \approx 0.5403 + 0.8415i$)다. 게다가 후자 즉 $i^i$는 허수끼리의 제곱임에도 심지어 그 값이 아래와 같이 실수(약 $0.2079$)로 계산된다.
\[i^i = (e^{i\pi/2})^i = e^{i^2\pi/2} = e^{-\pi/2} \approx 0.2079\]이렇게 현실에서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요소들을 공리로서 받아들이고 그 논리를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면 가장 아름다운 수식이라는 오일러 등식( $\mathbf{e^{i\pi} + 1 = 0}$)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삼위일체 역시 마찬가지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각 위격의 신비가 ‘유일신’이라는 대전제 안에서 만나 하나의 경이로운 진리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직관적으로는 모순처럼 보이는 추상적 개념도, 닫힌 논리 체계 안에서는 완벽하게 의미를 가지며 작동한다. 삼위일체 역시 ‘실체를 따지는’ 대상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체계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논리적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결론: 신비로 남겨두는 지혜와 사랑의 여정
수학에서 허수 체계를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더 넓은 수학의 세계가 열리는 것처럼, 삼위일체 역시 신앙의 관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실체에 대해 접근할 수는 없지만, 그 실체에 대한 증명을 유보하고 신앙의 공리로 받아들일 때, 신자들은 더욱 깊은 지혜와 믿음을 얻고 신의 사랑과 친교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삼위일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렇게 실제로 얻을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대신에, 구체화할 수 없는 본질을 굳이 예시를 동원해서 설명하려는 수천 년간의 시도는 신이 셋이라는 삼신론과 하나의 신이 상황에 맞춰 다른 위격을 연기한다는 양태론,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의 신을 삼분의 일로 나눈 존재라는 부분론의 사이를 오가면서 삼위일체에 대한 이단적 오해를 오히려 키워왔을 뿐이다. 오히려 그것을 신학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공리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적으로도 정직하고 신앙적으로도 충실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신앙인은 비신앙인과 달리 삼위일체를 단순한 공리들의 조합이 아닌, 이 세상의 근본적인 진리로 이해하기에 그토록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신을 사랑하기에 그 실체에 대해 상상하고 다가가려 애쓰는 마음, 신과 교리에 대한 바로 그 애정이 오히려 삼위일체를 신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는 닫힌 논리 체계를 넘어, 한 인격을 향한 사랑의 몸부림이기에 더욱 어렵고도 경이로운 여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