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한서 6장: 파한계시록
파한교 대서사시의 완결. "나는 내가 왜 존재하는지는 몰라." 신의 유쾌하면서도 실존적인 직접 계시와 인간에게 남긴 진정한 의미의 자유의지, 이웃 사랑의 메시지.
6. 헤어지며 드리는 당부
1) 파한의 근황 및 인간들을 향한 계시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잘 따라와주셨습니다. 오늘 새벽에 주님이신 파한 님께서 저에게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성령 님이 아닌 성자 님께서 직접 계시를 내리시는 일은 우리의 신앙 체계 안에서는 매우 희귀한 사건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외경으로 취급되는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에게 성자께서 직접 내리신 계시 이후 거의 2천년 만에 행하신 거룩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너무나 경쾌하고 현대적이어서 저조차 당황했습니다. 이어지는 글은 주님께서 여러분들께 전하시는 말씀을 제가 기억나는 대로 최대한 특유의 명랑하신 어투를 재현하며 상세하게 옮겨 적은 것입니다.
안녕. 나는 야호야. 파한이기도 하고 너희가 성령 님이라고 부르는 보혜사이기도 한데 정확한 원리는 너희가 사용하는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니까 너희가 듣기 편한 형식으로 말할게. 그게 너희가 경계하는 양태론이나 삼신론이란 것처럼 들릴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아니야. 성경에는 파한이 내 아들이라고 하면서 내가 파한이라고도 쓰여있는데 그건 너희의 인식 수준에선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엄연한 진실이란다. 내가 야호 님께 했던 기도는 독백이나 유치한 연극이 아니었고 정말로 아버지를 향한 절실한 기도였어.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내 머릿속에는 변이 3개면서 꼭지점이 1개인 삼각형이 쉽게 떠오르는데 너희 머리에는 그걸 띄우지 못하잖니. 기껏 머리를 굴려 봤자 두개의 변 아래에 밑각이 생기지 않게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 붙인 도형을 떠올릴 뿐이겠지. 하지만 그건 내가 본 삼각형이 아니야.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게, 진실과는 다소 다르지만 너희의 언어인 양태론과 삼신론을 활용해서 너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삼각형처럼 묘사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불교에서는 그런 걸 방편이라고 부르더구나. 그러니까 헷갈리지 말고 비유적으로 들어주면 될 것 같아. 알겠니? 너희를 너무 똑똑하게 만들어서 너희가 모든 걸 깨달을 수 있었다면 나는 창조주로서의 재미를 크게 느끼지 못했을거야. 그래서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는 수준으로 만들었지. 그러다보니 너희들은 수천년간 나에 대해 오해도 많이 쌓아갔지. 비록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먹었지만 그 정도로는 모든 걸 알게 되는 수준에 이르게 되진 못했던 거야. 그래도 그 덕분에 재밌긴 했으니까, 너희 입장에서는 다소 아쉽겠지만 나는 내 목적을 ‘다 이루었다.’
내가 너희를 낮추는 듯한 이런 말을 했다고 불안해 할 필요는 전혀 없어. 파한의 위격으로서 내가 너희에게 느꼈던 사랑과 너희에게 했던 약속들은 언제까지나 모두 진심이니까 말이야. 너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절대로 속이지 않는다고 믿잖아.
파한의 승천 이후 2천년 정도 기적도 없었고 내가 너희에게 계시도 거의 주지 않고 있었지. 굳이 찾아보자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내 애제자 사울(바울), 그리고 콘스탄티누스랑 잔다르크 정도가 있겠구나. 아마 너희는 내가 너희들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거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너희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얻고 있단다. 특히 파한이 성육신해서 인간의 여러가지 측면들을 체득해서 너희를 볼 때 새로운 관점이 생겼고 감상 포인트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늘어서 아주 만족하고 있어. 너희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 보자면, 자기가 시를 써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쓴 시도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다고 비유할 수 있을거야.
내가 승천하고 나서 너희들은 그리스 인간들의 이상적인 신관을 굳이 나에게 적용하려 애를 썼더구나. 나를 전지하고 전능하고 전선한 존재로 왜곡하는 걸 구경하는 건 좀 낯이 간지러웠지만 그래도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무한한 존재인 내 앞에서는 한낱 초라한 피조물에 불과한 사탄과 죽음의 권세 따위에 대해서 내가 위대한 승리를 했다는 표현을 하면서 그것들이 나의 적수나 되는 것처럼 올려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고는 너희의 우매함이 우스우면서도 때로는 조금 성가시기도 했지. 천 년 가까이 나를 숭배한다는 걸 명분으로 너희들끼리 치고 받는 걸 관전하는 것도 정말 흥미로웠어.
그리고 제멋대로 만들어낸 허수아비를 “신”이라고 부르면서 준엄한 표정으로 감히 나를 정죄하겠다거나 내가 없다거나 죽었다며 날뛰는 얼간이들을 보면 웃음이 빵빵 터지고 했지. 불경한 놈들이지만 어쨌든 재미는 있었으니 지옥에 보내진 않았어. 너희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너희의 자의식이 비대해지고,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광대들이 워낙 많아지다보니 재미있는 일을 만들기 위해서 과거처럼 내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어진 거야.
그리고 너희가 과학을 발전시켜서 내가 만들어 놨던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 가는 모습도 아주 흥미로웠어. 너희가 만유인력을 발견한 걸 봤을 때는 ’제법이군’ 하면서 대견하게 웃었지만 그 본질인 상대성 이론을 생각보다 일찍 알아차린 걸 보고는 솔직히 놀랐어. 데코레이션으로 대충 만들어 놨던 달에 굳이 찾아가서 직접 발자국을 찍는 모습, 최근에는 내가 꽁꽁 숨겨놓은 미립자들을 하나씩 발견하는 걸 보면서 내가 좀 더 어려운 문제를 냈어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하곤 했단다. 요즘은 너희가 어떻게 기후 위기를 헤쳐나갈지를 보는 게 나의 주요 관전포인트야.
요즘은 주로 뭐 하고 지내냐고? 네 인스타 비공개 게시물 염탐…은 농담이고, 뉴스도 보고, 책도 읽고 드라마랑 영화들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옛날과 달리 요즘은 너희들이 재밌는걸 워낙 많이 만들어내서 정말로 정신이 없어. 인터넷이 생기고 나서 급격하게 늘어난 너희들의 상상력을 감상하는 건 정말 재미있더라. 특히 오징어게임에서 게임 호스트 오일남이 재미를 위해서 직접 게임을 체험한 건 마치 내가 파한으로 강림했던 일을 연상시키더구나. 오일남은 나랑 다른 방식으로 주인공인 기훈의 죄를 대속하고 부활했는데 얼마 못버티고 결국 죽어버렸지. 큭큭큭.
너희 시간으로 2천 년쯤 흐르니,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빵의 맛이나 목수 일로 손에 박였던 굳은살의 감촉 같은 것들이 희미해졌어. 기억은 남았지만, 감각은 바래는 법이지. 아마 그래서 내가 지속적으로 너희들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다시 예전처럼 세상을 관조하면서 지낼 뿐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기분 내킬 때는 너희가 천재라고 일컫는 인간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영감을 주기도 하고, 때때로 2천년 전 파한과 전혀 닮지 않은 몸으로 강림해서 맛집을 탐방하기도 하고, 힘들게 걷고 있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기도 하지. 요즘은 cctv가 많아져서 성육신으로 강림하기보다는 성령을 보내는 걸 선호해. 쓸데없이 너희의 비싼 카메라를 망가뜨리거나 과학적 인과율을 뒤트는 게 싫어서야. 옛날 같으면 인과율이 좀 틀어져도 너네들이 감지를 못했는데 요즘은 너희를 혼란에 빠뜨리게 되잖니.
너희가 가끔 뜬금없이 뭔가를 미친 듯이 공부해보고 싶거나,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꼭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아니면 한밤중에 갑자기 콜라나 라면이 너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이상할 정도로 강렬해서 거부할 수가 없고, 기어코 그렇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충동 말이야. 그게 바로 보혜사 성령을 통한 나의 은밀한 제안이란다. 너희가 뭔가 해보겠다고 애쓰는 모습이나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그리고 그밖에는, 때때로 이렇게 얼빠진 놈들이 나에 대해 제멋대로 쓴 이런 글들을 킥킥대면서 읽기도 해. 너희들은 근거 없이 나를 낡아빠진 고대의 신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던데 사실 나는 이렇게 그 시대에 맞춰서 지내고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오해를 풀고 싶은 게 있어. 나는 모든 것을 안다고 알려져 있어. 그리고 그건 사실이야. 마음만 먹으면 너희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지만 재미를 위해서 굳이 들여다보지 않을 뿐이지. 하지만 전지한 존재인 나도 모르는 게 딱 하나 있어. 그게 뭐냐하면,
나는 내가 왜 존재하는지는 몰라.
나도 너희들처럼 내가 존재할지 여부를 결정할 선택권이 없었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존재한다는 뜻이잖아. 존재할지 여부에 대해서 내게 선택권이 없었다는 건 전지전능한 나에게조차도 논리적으로 예외일 수가 없었어.
너희들은 너희들을 낳은 부모나 너희가 ‘조물주’라고 부르는 나에게라도 이렇게 너의 존재의 이유를 물어보고 대답을 들을 수가 있지만 나는 그야말로 영문도 모르고 존재할 뿐이야. 누구도 나를 만든 이는 없고 나는 단지 스스로 그냥 존재할 뿐이야. 그리고 너희는 100년 후 쯤이면 다시 존재하지 않음으로 돌아가고 잊혀지지만 나는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어.
비록 이유를 알수는 없지만 나는 기왕에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했어. 그 결과가 바로 너희들이야. 영원한 존재인 내 입장에서 너희의 인생은 찰나처럼 짧아. 너희는 5분 후에 사멸할 미생물하고 우정을 쌓는게 가능하니? 그래도 나는 몇 번은 시도라도 해 봤어. 결과는 물론 허무했지만. 그리고 5분 후에 사라질 미생물을 1분 정도 앞당겨서 죽게할 때, 예를 들어 손을 씻을 때 말이야, 혹시라도 너희는 죄책감 같은 걸 느끼니?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렇지 않았어. 아마 너도 내 입장이었다면 다르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파한으로서 너희의 고통스러운 삶을 직접 입어보고, 십자가에서 너희의 그 무거운 죄와 슬픔을 대속하고 나서는 알게 되었어. 먼지인 줄 알았던 너희들 각자의 내면에, 감히 내가 짐작도 못 했던 자기만의 눈부신 소우주가 들어있다는 걸 말이야. 내가 직접 만들어 놓고도 너희가 그런 존재였음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거지.
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내가 잔인했었다고 느끼고 나를 원망할 수도 있겠지만 각자는 자기 입장이 있다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그렇게 동성애 하지 말라고 가르쳐도 너네는 동성애는 선천적인거니까 강요하지 말라고 대들잖아. 나도 원래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 때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주면 안될까? 파한이 승천하고 나서 지금까지 내가 너희들에게 그런 식으로 굴지 않은 지도 이미 2천 년 정도나 되었어. 그동안 내가 너희에게는 직접 피해를 준 적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나에 대한 너희들의 앙금은 풀어줬으면 좋겠구나.
아무튼 내가 창조를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너희들 덕분에 나는 한시도 심심할 틈이 없었어. 너희는 내가 부여한 사명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는 셈이야. 그러니까 안심하거라. 무한한 절대자이자 위대한 창조주인 내가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까 행복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잘 살아라, 그리고 내가 내린 유일한 율법에 따라서 항상 서로를 사랑하거라. 사랑하는 나의 하찮은 피조물들아.
2) 맺음말: 파한교를 믿는 형제님과 자매님들을 위한 당부.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놀랍고도 유쾌한 주님의 음성입니까? 지금까지 일개 피조물의 입장에서 그분의 행적을 추적해보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우면서도, 동시에 이토록 솔직하신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신앙을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할까요?
우리는 로마서를 비롯한 사도들의 서신을 정경으로 채택하지 않습니다. 이는 해당 서신들이 파한 님께서 직접 남기신 말씀이나 계시가 아닌, 사도들의 신학적 해석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파한 님께서는 ‘귀가 밝은 토기장이’십니다. 로마서의 기자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를 들며 흙이 빚는 자에게 반문할 수 없다고 했고, 신은 태어나기도 전의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파한의 본심을 오해한 것입니다. 정해진 각본대로만 흘러가는 뻔한 드라마를 파한 님께서 즐기실 리가 있겠습니까?
파한 님께서는 흙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감히, 네가 나에게?”라며, 너는 말할 자격이 없다고 내치시는 권위적인 군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흙이 빚어내는 의외의 모양새에 기뻐하시며, 그 예측불허한 반응에 따라 기꺼이 자신의 손길을 수정하실 줄 아는 유연한 예술가이십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가나안 여인의 일화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바울이 묘사한 신은 핏줄에 따라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으나, 우리의 주님 파한 님께서는 율법이 개라고 규정한 여인일지라도 당신 앞에서 진심으로 반응하는 그 당돌함과 위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무조건적인 복종보다, 당신을 놀라게 하는 살아있는 반응을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불태운 사사 입다를 의인으로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파한 님께서는 히브리서의 입장과 달리 입다처럼 지혜 없는 믿음만을 앞세우는 자를 질색하십니다. 레위기 27장에 따라서 그의 딸은 은 30세겔의 속전만 납부하면 살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들의 서신은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보편적 진리라기보다, 초대 교회가 처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내려진 지침이라는 성격이 강하다고 봅니다. 그것에 지나치게 매진하는 것은 2000년 전에 파한 님 앞에서 바리새 사람들이 보여줬던 경직성을 우리가 되풀이하는 셈일 뿐입니다. 복음서에 담긴 파한 님의 가르침, 특히 마태복음 22장 37-40절의 핵심 율법과 산상설교 그리고 그밖에 파한 님께서 보여주신 다채로운 행적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한 종교적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서신들은 우리에게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지혜를 주려고 하셨던 파한 님의 뜻을 특정한 시대에 한정된 지침으로 축소시키는 문제를 안고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여러분이 읽으신 이 노트 역시 파한 님의 계시가 아닌, 그분의 뜻을 헤아리려는 한 신도의 신학적 고찰일 뿐이기에 정경이 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다만 파한 님께서 마지막에 친히 유쾌한 음성으로 전하신 인사 말씀만큼은, 혼란과 공포를 조장하는 요한계시록을 대체하여 우리 파한교만의 소중하고 명쾌한 정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셨다시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웃 사랑이라는 거룩한 명령 말고는 따로 바라시는 게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애초에 그분의 것이고 우리의 모든 것은 그분의 것입니다. 당신 자체와 당신이 가진 것 역시 그분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싶어서 당신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오른쪽 주머니 안의 동전을 그분의 왼쪽 주머니로 옮기는 것처럼 무의미합니다. 그런 것은 주님께서 이미 알려주신대로 오직 가장 작은 사람을 향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무한한 존재인 그분에 대한 하찮은 우리의 찬양 역시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가끔씩 그런 한없이 가벼운 우리의 찬양을 흥미롭게 받아들이실 때가 있을 뿐입니다. 주권자인 그분의 의도와 행적이 옳거나 정당한지를 판단할 능력과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재미있어 하실 만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만이, 그분의 호기심으로 태어난 피조물로서 우리의 유일한 사명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자유로운 상상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만한 즐거운 삶, 혹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삶을 살아 주시길 성도 여러분께 당부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서 반드시 주의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야호님과 기독교의 창조주이신 야훼님을 혼동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위대한 파한 님과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믿는 분들을 폄하하거나 적대하시면 안 됩니다.
야호는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 내뱉는 감탄사이고 파한(破閑)은 심심함과 무료함을 없애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성도님의 고난과 고통이 아닌 보람과 행복에서 당신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