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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한서 1장 - 파한교의 기본 교리

기독교 성경을 오마주하여 창작된 DIY 종교 '파한교'의 서문. 신은 선한 존재가 아니라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유희를 추구하는 무한한 존재라는 파격적인 교리를 소개합니다.

파한서 1장 - 파한교의 기본 교리

이 글에서 다루는 종교는 기독교를 오마주하여 만들어진 상상 속의 DIY 종교다. 종교의 이름은 파한교이고 신의 이름은 야호이다.

파한교 성경은 기독교 성경 중 구약과 복음서, 사도행전이 합쳐진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과 메시아의 이름을 제외한 모든 글자가 같다.

성경 이외의 내용으로는 삼위일체론과 자유의지론을 채택했다.

이 글은 종교의 내부적 모순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파한교 특유의 교리를 설파하고자 작성된 파한교 권위자의 서신문이다.


서문: 믿음의 여정에서 고뇌하는 나의 소중한 벗들에게.

요즘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 특히 진리를 향한 열망이 깊은 이들 가운데서, 믿음의 길에 대한 혼란과 고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경전과 교리 속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을 발견하고, 야호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고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이에 저는, 주님의 뜻을 먼저 헤아린 자로서,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여러분에게 작은 등불이 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에 담긴 내용은 혹여 믿음이 얕은 이들에게는 오해를, 굳어진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반감을 살 수 있기에, 오직 진실로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여러분께 전합니다.

이 서신은 우리 파한교가 추구하는 ‘내부적 모순의 최소화’라는 교리 아래, 야호 님의 행적과 그분의 아들 파한 님의 사역을 솔직하게 고찰한 기록입니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 각자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세우는 믿음의 디딤돌이 되기를,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시기를 파한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파한교의 기본 교리

1) 신의 영광과 인간의 오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오만을 철저하게 부수고 철저하게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의 시각으로 무한한 주님을 바라볼 때 저지르기 쉬운 오해들에 대해 미리 살펴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참뜻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한한 존재인 주님에 대한 오해

우리의 주님 야호 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이유에 대해서 신이 스스로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였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체 모순적입니다.

야호 님께서는 무한한 존재입니다. 반면에 세상과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과 생명체를 합쳐봤자 유한합니다. 나아가 세상 모든 것이 유한할 뿐입니다.

인간과 대장균 한 마리를 비교해보십시오. 둘은 비교할 수 없이 큰 규모의 차이를 보이지만 그래봐야 유한과 유한의 비교에 불과합니다. 반면 야호 님과 세상은 무한과 유한의 비교이기 때문에 야호 님의 입장에서 세상이란 인간이 본 대장균 한 마리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성도 님들 각자 자기 창자 안에서 살고 있는 대장균의 100억 마리의 찬양을 받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게 형제 님의 실생활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있겠습니까?
다만 현미경으로 그 찬양 장면을 관찰할 때 나름 재밌고 대견해 보이긴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한한 존재인 주님께서 유한한 우리들 따위에게 찬양을 받는다고 그분의 영광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로부터 무엇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주님께 아무런 외부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하는 행동을 보시면서 스스로 내적인 만족을 찾으실 뿐입니다.

신의 완전성

완전한 존재인 신이 외부 세계(피조물)로부터 ‘재미’를 찾는다는 점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완전하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하는데,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일종의 결핍이나 필요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완전성’의 개념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학에서 다루는 신의 ‘완전성’이란, 신이 존재 가능한 모든 것을 자신 안에 포괄해야 한다는 의미의 ‘전체성(Totality)’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완전성이 그런 의미라면, 신 외부에 어떤 창조물이라도 존재하는 순간 그 자체로 완전성은 깨지게 되어 창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신학에서 신의 ‘완전성’은, 신이라는 독립된 개체가 지닌 속성들의 지고함과 흠결 없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비유하자면, ‘완전한 정삼각형’이라고 해서 그 도형이 세상의 모든 개념이나 존재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완전함은 도형 자체의 기하학적 속성이 완벽하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의 완전성은 고유의 본성과 능력이 최상위의 수준에 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이 외부 세계를 창조하거나 그로부터 비롯된 내적인 경험(예: 재미, 사랑)을 느끼는 것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완전한 속성을 지닌 주님께서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 유한한 세계를 창조하고 관찰하는 것은, 신의 완전성과 본질적으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완전한 능력과 자유를 지닌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

이런 점에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까닭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창조의 목적은 주님께서 느끼시는 내적인 만족, 쉽게 말해서 재미였습니다. 예측하지 못한 사건의 의외성이 없다면 재미를 발견하기는 어려워집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도 님들의 양손에 퍼펫 인형을 각각 끼워보십시오. 왼손에 끼운 인형의 입을 벙긋거리면서 이렇게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 주인님은 너무 좋은 분이야.”

이번에는 오른손의 인형도 입을 벙긋거리면서 동조하게 해 보십시오.

“맞아. 우리 주인님을 생각할때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서 너무 행복해.”

성도 님들이 제정신이라면 이런 유치한 행위에서 아무런 재미를 찾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퍼펫 인형이 여러분의 손에서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그러한 목소리를 낸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들께서 굳이 그 인형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인형이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를 미리 알고 싶지 않으실 것임은 자명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도, 우리들의 한없이 얕고도 좁은 내면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행동을 예지하시지 않는 이유와 같습니다.

2) 존경받지는 않지만 숭배받는 신.

우리 파한교의 가장 차별적인 특징은 바로 ‘신은 선한 존재’라는 근거 없는 확증 편향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믿음을 시작하시는 성도들께서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우리의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님과 자매님들께서 보다 수월하게 이 점을 납득하실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신은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다.”라는 선언은 사실 명제입니다. 진위를 따져볼 수 있는 명제이고, 그것이 참이라고 밝혀진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반면에 “신은 선한 존재다.”라는 선언은 사실 명제가 아니라 주관적인 가치 명제입니다. 즉, 신이 선한 존재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며, 우리는 성경에서 보여지는 주님의 다양한 행적들을 통해 주님께서 전적으로 선하다는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적인 교리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숭배의 본질: 선함이 아닌 ‘압도적인 힘’

사람들의 숭배를 이끄는 것은 능력이고, 존경을 이끄는 것은 선함입니다. 무능하고 돈도 못 벌고 요령도 없지만, 평생을 바쳐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지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그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으며 오히려 깊은 존경심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모자란 능력을 가진 그를 ‘숭배’하기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숭배의 대상들은 선함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함과는 거리가 먼 바알, 아세라, 몰렉 등 이방 신들을 두려워하며 섬겼고, 다른 문화권의 절대적 신인 제우스나 오딘 역시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선량함과는 거리가 먼 폭군들도 당대 백성들의 숭배를 받았습니다. 전근대 한국인들이 숭배했던 호랑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임에도 상대하기가 워낙 어렵다 보니, 이를 산의 왕이라는 뜻의 ‘산군’이라고 부르거나 산신령의 현신으로 신격화하여 숭배했습니다.

다만, 호랑이는 강하고 대적하기에 까다로운 맹수일 뿐 야호 님과는 달리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호랑이를 영험한 존재로 추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랑이 사냥을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호랑이를 잡기 위해 착호갑사라는 특수부대를 두기까지 했습니다. 야호 님 역시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사람이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다면 사람들이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두려움을 주는 주님을 호랑이처럼 처단하려고 들지 않았을까요?

만약 전지전능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미약한 개미들을 임의로 짓밟아 죽이기도 하고, 가끔 설탕과 빵가루를 뿌려주면서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요구한다면, 개미 입장에서는 그를 떠받들어야 할 두려운 신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등한 타인의 시선에서는 그저 한심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렇듯 선함과 숭배는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없으며, 숭배의 가장 강력한 원인은 도덕성이 아니라 ‘압도적인 힘’에 있습니다.

무한함의 역설: 희생 없는 은혜와 결핍 없는 악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존경을 일으키는 근원은 무엇일까요? 바로 ‘희생을 통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1조 원을 가진 사람이 1억 원을 기부하는 것과, 10억 원을 가진 사람이 1억 원을 기부하는 것은 객관적인 액수는 같을지라도 선한 마음의 무게감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무능하지만 선한 지인은 자신에게 희소한 자원인 시간과 돈을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무한한 존재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내어주셔도 당신께서 가지신 것에서는 조금도 비워지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무한한 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를 따지는 것은 그분의 선함을 판단하는 지표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의 반대인 ‘악’의 기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악을 저지르는 근본 원인은 대부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이 가졌을 때 느끼는 ‘결핍’과 ‘욕망’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충만한 분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존재는 타자의 것을 탐낼 동기가 없습니다. 또한, 단지 타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악을 저지르는 ‘순수한 악의’ 역시 전능자보다는 흠결 많은 존재에게나 어울리는 가학성입니다. 즉, 주님은 무한하기에 뼈를 깎는 희생(선)을 할 필요도 없고, 결핍이 없기에 치졸한 탐욕(악)을 부릴 이유도 없는, 도덕을 초월한 절대적인 힘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방어기제와 투사된 희망

성경 속에는 주님께서 선하신 존재라며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인간들이 많이 보이지만, 의외로 주님께서 스스로의 선함을 객관적으로 증명하시는 장면은 드뭅니다. 그나마 그 성품을 묘사한 출애굽기 34장 7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새번역)**

성경 안에서 빈번하게 펼쳐지는 연좌제 처형과 대량 살상은 대부분 이 구절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시편 136편과 같은 수많은 찬양시들은, 남의 집 장남들을 죽이고 군대를 수장시키는 압도적인 폭력을 목도한 인간들이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참으로 선하십니다.”라며 생존을 위해 그 무력을 ‘선함’으로 재정의한 생생한 현장입니다. 사람들은 압도적인 두려움을 마주했을 때, 그 힘을 가진 자가 부디 ‘악’하기보다는 ‘선’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따라서 기존 종교들이 주님을 ‘선하시다’고 선언해 왔던 맹목적인 교리들은,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토록 강한 존재가 부디 우리에게 우호적이기를 바라는 인간의 절박한 ‘희망의 투사’에 불과합니다.

3) 신의 내면적 변화 가능성

말라기 3장 6절에서 야호 님께서는 스스로를 ”변하지 않는 존재”라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경전을 살펴보면, 야호 님께서는 실제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과거에는 홍수나 불벼락으로 인류를 손쉽게 심판했으나, 예언자들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물리적 개입을 최소화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회개의 기회조차 없이 파괴했으나, 니느웨에는 회개의 기회를 주어 그들의 반성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사 시대까지는 소, 양, 비둘기 같은 제물에 개걸스럽게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셨으나, 그 이후에는 물질적 제물보다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더욱 중시하시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죗값을 삼사 대에 걸쳐 묻겠다며 무서운 뒤끝을 보이셨으나, 선지자 에스겔에게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부정하며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꾸셨습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신의 ‘불변성’이란, 마치 돌덩이처럼 그 어떤 내적, 외적 변화도 겪지 않는 완전한 정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신의 본질적인 속성 일부가 영원함을 강조하는 선언으로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변하겠습니까?

첫째는 언약에 대한 신실함입니다. 야호 님께서 맺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능하고 무한하다는 야호 님의 존재론적 속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행동의 기저에 있는 ’재미’를 추구하시는 동기 역시 변하지 않습니다.

한편, 이 불변하는 속성 외에는 시대와 대상에 따라 변화하는 주님의 속성 또한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인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담, 카인, 욥과는 직접 대면하여 소통했으나, 아브라함 대에는 주로 계시를 이용했으며, 모세 이후로는 천사나 예언자를 통한 간접 소통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인간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왕정 시기까지는 직접적이고 가혹한 처벌을 내리셨으나, 이후에는 물리적 개입을 줄이고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선회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벌 역시 현세에서 지옥으로 그 장소를 옮기셨습니다.

이렇듯 야호 님께서는 불변하는 본질과 변화하는 관계 양식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파한교는, 야호 님을 단순한 절대자를 넘어 스스로 배우고 관계 속에서 변화하며 ’내적인 성장’이 가능한 신으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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